생애

불굴의 독립 혁명가

조봉암(曺奉岩, 1898년 9월 25일 ~ 1959년 7월 31일)은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에서 창녕 조씨인 아버지 조창규(曺昌奎)와 어머니 유씨(劉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1년 그는 강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농업보습학교로 진학했다. 졸업한 후 극심한 가난으로 중학 진학을 포기하고, 생계를 위해 조봉암은 강화군청 사환으로 복무했다. 19128년 대서보조원으로 활동하였다.

3.1운동 직후 복역한 일체치하의 서대문 형무소.

1919년 잠두교회 청년단의 중심이 되어 3월 18일 강화의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 날 아버지가 사망해서 시위 현장에서 떠나 체포는 면했으나, 4월 주동자로 결국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개월간 복역하였다. 복역 중 심한 고문과 학대에 시달리면서 그의 생에 큰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1920년 서울로 상경하여 YMCA 중학부에서 수학하다가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준비한다는 혐의로 평양경찰서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경성 YMCA

1921년 7월 7일 일본으로 건너가 엿장수를 하며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하고, 주오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박열, 김약수 등과 아나키스트 모임 흑도회(黑濤會)에 조직하였지만 관념적 유희에 그쳐 실망하게 된다. 보다 강력한 조직력이 있어야만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공산주의에 입각한 독립 쟁취를 목표로 변화하였다. 러시아혁명을 주도한 볼셰비즘의 영향으로 북성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하다가 1922년 여름에 귀국하였다.

세이소쿠 영어학교

주오대학 정문

1922년 10월 소련에서 열린 베르흐네우딘스크 대회에 한국인 공산주의자 대표로 참석하였고, 12월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 속성과에 입학하였다. 1923년 여름 폐결핵으로 중퇴하고, 9월 비밀리에 국내에 잠입하였다.

1924년 신흥청년동맹을 결성하고 해주, 평양, 인천등지에서 강연활동을 하였고, 6월 동지인 김조이와 결혼을 하였다. 9월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1925년 4월 17일 경성에서 열린 조선공산당의 조직에 참여하고, 4월 18일 서울에서 박헌영, 김단야(金丹冶) 등과 박헌영의 집에서 비밀리에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간부가 되었다.  

1925년 4월말 조선공산당을 승인받기 위하여 모스크바로 출국하였고, 도중에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방문하였다. 8월 모스크바에서 도착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을 승인받는다. 1926년 1월 상하이로 가서 김찬, 김단야 등과 함꼐 조선공산당 해외부를 설치하였다. 5월 만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하고, 책임비서에 선출되었다. 1926년 7월 재상하이 코민테른 극동부 조선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27년 1월 김이옥이 상하이로 찾아와 동거했고, 4월에 임정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4월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 장쑤성위원회 산하에 한인지부를 조직하고 책임자가 되었다.

1928년 9월 30일 김이옥이 딸 호정을 출산하였고, 1931년 1월 중국공산당 상하이지부 서기가 되었다. 1932년 9월 28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프랑스공원에서 체포되었고 12월 고국으로 압송되었다.

첫사랑 김이옥, 딸 호정

조봉암 체포를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

1933년 김이옥, 조호정 모녀가 귀국하였으나 10월 26일 강화도에서 김이옥 여사가 돌아가셨다. 12월 27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7년을 선고받았다. 고문으로 상한 손가락 7개를 동상으로 잃어야 했다. 1939년 7월 석방되어 인천으로 왔고, 김조이와 재결합하였다.

공산주의와 결별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

1945년 1월 예비구금령으로 구속, 헌병대 감방에 갇혔고, 8월 15일 석방되어 여운형이 마중을 나왔다. 8월 18일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조직하였다. 1946년 2월 7일 인천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고 회장이 되었지만, 5월 사임하고, 6월 23일 "우리는 노동계급의 독재나 자본가 계급의 전제를 반대한다"는 내용의 전향성명서인 “비공산 정부를 세우자”를 인천시민대회장에서 살포하고 각 신문사에 발표했다.

1946년 9월 인천 우익 인시들과 교유하며 통일건국회를 결성하고 10월에는 하지 중장을 만났다. 1947년 4월 25일 윤봉림과의 사이에서 딸 임정이 출생하였다. 1948년 인천을구 제헌의원에 당선되었다. 6월 1일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이 되어 기본권 보장을 위해 한민당 안을 반대였다. 85명의 무소속 의원들을 규합해 무소속 구락부을 결성하고 대표가 되었다.

대한민국 초대 내각
(가운데가 이승만, 바로 뒤 왼쪽이 조봉암)

불후의 업적 토지개혁을 추진한 초대 농림부 장관

1948년 8월 2일 초대 농림부 장관에 취임, 농지개혁법을 입안했고, 세계 최고의 토지균등성을 확보하여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기반을 놓았다. 또한 곡식의 잉여생산량을 정부에서 매입하는 양곡매입법의 제정을 추진하였다. 이는 시장경제논리에 어긋난다는 한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에 상정하여 48년 8월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농업협동조합 설립에도 적극적이었다. 1949년 2월 22일 농지개혁에 반대하는 한민당의 견제로 인한 관사 수리비 유용혐의로 농림부장관직을 사임하였지만, 이후 무혐의로 밝혀진다. 7월 23일 아들 규호가 출생했다.

1950년 인천병구에서 무소속으로 제2대 총선에서 당선되었고, 국회부의장이 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국회는 서울을 사수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국무위원 대부분이 피난을 떠났다. 24명의 의원들이 전란 속에 납북되거나 월북했고 나머지는 무작정 ‘남쪽으로’ 도망쳤다.

그 와중에 국회의 품위를 지킨 건 부의장 조봉암이었다. “가족들 대신 국회 기밀서류를 싣고 남하했다. 그 때문에 정작 자신의 부인을 데려오지 못했고, 서울에 남은 부인 김조이 여사는은 나중에 북한군에 강제로 납북돼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서울은 조선인민군이 점령하였고 “반역자 조봉암은 체포하면 죽인다.”라는 방이 붙여져 있었다. 8월 26일 윤봉림과의 사이에서 딸 의정이 출생하였다.

1952년 제2대 후반기 국회부의장에 재선되었고, 제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2등으로 낙선하였다. 1954년 이승만정권의 탄압으로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입후보 등록에 실패하였다.

1954년 11월 자유당의 연임에 저항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려 하였다. 1955년 1월 호헌동지회 총회가 열릴 때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찬성파와 반대파로 분열했다. 결국 조봉암의 참여는 좌절되었고, 1955년 12월 22일 서상일, 박기출, 이동화, 김성숙 등과 진보당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대표가 되었다.

제3대 국회의원선거 인천병구에
입후보하려는 조봉암 벽보

1956년 “책임정치 수립, 수탈 없는 경제 실현, 평화통일 성취” 등을 내걸고 대통령선거에 출마, 야당 대통령후보 단일화 논의 중에 신익희 후보가 사망하였고, 5월 15일 대통령선거에서 216만여 표를 얻어 2등으로 낙선하였다.

11월 진보당 창당대회를 열고 개회사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이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라고 밝히고 당위원장이 되었다.

1958년 1월 13일 체포, “평화통일론이 북진통일이라는 국시의 위반이며 간첩 박정호와 접선했다”는 조작된 혐의를 모두 부인하였다. 7월 2일 1심 결심공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9월 4일 2심에서는 양이섭이 1심 진술을 번복해 “고문에 못 이겨 허위진술을 했으며 북한에서 공작금을 받지 않았고 조봉암에게 준 돈은 후원금이지 공작금으로 준
게 아니다”라고 진술하였다. 10월 25일 2심 결심 공판에서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결성하고 간첩행위를 했다고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장택상과 윤치영의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하였고, 7월 30일 재심청구를 기각하고 7월 31일 오전 11시 사형이 집행되었다. 8월 2일 망우리 묘지에 안장되었다. 

묘소 앞 돌에는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가 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한가?”라고 적혀있다.

대법원 선고 공판 맨 왼쪽이 조봉암

북한에서 6.25전쟁 당시 반역자, 배신자, 변절자로 낙인에 찍히고 공격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애국렬사릉에 가묘를 설치하였고, 1990년대 이후에는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이는 조봉암의 명예회복에 큰 장애로 작용했다.

1991년 윤길중 의원이 “죽산 조봉암 사면 복권에 관한 청원”을 작성 국회의원 86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제출하였다. 2001년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강화역사관 입구 진해공원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국가가 피해자와 유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며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라고 권유하였다. 2008년 8월 15일 김조이 여사에게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2009년 사회원로와 여야 정치인 145명이 “죽산의 명예회복 청원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부의 재심 무죄판결문

“피고인은 일제강점기하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을 탈당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여 제헌국회의 국회의원, 제2대 국회의원과 국회 부의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52년과 1956년 제2, 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또한, 피고인은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농지개혁의 기틀을 마련하여 우리나라 경제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그 후 진보당 창당과 관련한 이 사건 재심대상판결로 사형이 집행되기에 이르렀는바, 이 사건 재심에서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 대부분이 무죄로 밝혀졌으므로 이제 뒤늦게나마 재심판결로써 그 잘못을 바로잡는다”

현재 죽산조봉암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서훈 추서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